이런 저런 이야기/성경 이야기

성경책: 마초 삼손과 흠모 할것 없던 예수님

벌꿀사랑 2024. 5. 27. 17:27

 

 

 

 

구약 성경의 이야기. 

성경 사사기 13-16장에 걸쳐 나타나는 삼손의 이야기는
예수님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사기의 삼손 이야기는 불임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는 아브라함고 이삭에 이어지는
불임 여성으로부터의 새로운 생명의 잉태가
하나님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희망이 사라진 불임 여성, 현대와 같은 의료 발달된 시대에도
불임은 난치 중 하나요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함에도
때로는 매우 이루기 어려운 난제이다.


삶의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 하나님의 사자가
삼손의 부모에게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신비한 한 가지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기묘자요 모사라 불리우는 분은 성경에서 누구를 말하는가?

바로 예수님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신약의 이야기다.
따라서 기묘자가 예수님이라는 이분은
태초부터 존재하신 분이시요,
성육신 이전부터 인생의 문제 위에
역사하신 분이심을 알게된다

기묘자가 삼손의 부모에게 아이가 태어날 것을 말하며,
성령 안에서 이 아이가 구별된 자로서
성장해야 함을 말씀하신다.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즉 구별된 존재로써 세상에 취하지 말고,
제단에 드려지는 돌처럼
사람의 손으로 다듬지 않는 온전한 헌신과
약속의 상징으로 선별되었다.

사사기 13장 25절에 보면, 삼손은 성장한 후 성령,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서
그의 사역을 위해 나아갔음을 보게 된다.

이 이야기들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
동정녀에게 나시고,
따지고 보면 동정녀도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니
불임의 상태와 같고,
성령 안에서 구별된 삶을 사셨고, 그의 공생에 역사 안에서도
성령이 임재하시고, 성령이 광야로 이끄셨다는 표현등이
우리로 하여금 삼손과 예수님의 사역의 유사성을 보게 한다.

다만 차이는 무엇인가?

삼손은 자신의 힘과 능으로 세상과 민족을 구원하려 하였다.
무려 일천 명을 때려죽이는 초능력적인 힘을 가지고
자신의 힘을 통한 전쟁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였다.
폭력에 근거한 구원이라는 표현은 왠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초월적 지도자를 제시한다.
모든 것을 때려눕힐 힘으로 통치하여
구원을 이루는 승리의 상징,
일인 군다, 전략적 무기,
삼손은 우리가 염원하는 구원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삼손은 힘을 자랑하며 안하무인처럼 굴다가
그의 약점이 노출되어 처절하게 망가진다.
언약의 상징이 깨어져, 밀려버린 머리카락과 뽑힌 눈으로
그가 추구했던 구원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에 반하여 예수님은 어떤가?
예수님은 흠모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힘도 없었고, 연약해 보였으며,
말구유에 오시고, 나귀를 타셨다.
힘의 상징도 없었고,
오직 자비와 사랑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분이었다.

삼손도 두 팔을 벌리고 기둥을 안고 죽었다면,
예수님도 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받지 못했다.
다만 십자가의 죽음은 자비와 사랑으로 온 인류를 덮는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었다.


결과는 다르다.
삼손의 죽음은 더 죽이고 더 죽이며 실패하는 구원이었다면,

예수님의 구원은 자기를 내어주시는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때로는 세상의 멋짐, 근육과 힘이
연약한 사랑과 자비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직도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민족이 민족을, 타인을 향한 압제를,
이웃에 대한 폭력과 전쟁이 만연한 사회를 산다.

하지만 기억하자
진정한 구원은 자비와 사랑으로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힘이 주관하는 세상의 논리를 벗어나,
자비와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을 바라봐야 한다.